김병근 목사 칼럼
죽을 때 죽어야 산다
현대 의학이 밝혀낸 세포의 세계에는 경이로운 우주의 법칙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수십 조 개의 정상 세포들은 전체 유기체의 생명과 조화를 위해, 때가 되면 스스로 양보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프로그램된 지도를 품고 태어납니다. 생물학에서는 이를 ‘세포 사멸 (Apoptosis: 아포토시스)’이라고 부릅니다. 상처 입거나 수명이 다한 세포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기꺼이 흙으로 돌아갈 때, 우리 몸은 비로소 새로운 세포를 받아들이며 날마다 생명력 넘치는 작은 부활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순리와 천명 (天命)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이단아가 있습니다. 바로 암세포 (Cancer)입니다. 암세포의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죽는 법’을 잃어버린 독선에 있습니다. “나만은 절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겠다”며 불사 (不死)를 주장하는 암세포는 전체 몸의 통제 신호를 완전히 무시한 채 독자 노선을 걷습니다. 주변 정상 세포로 가야 할 혈관을 자기 쪽으로 강제로 끌어당겨 영양분을 싹쓸이하고, 독소를 뿜어내며 이웃 세포들을 녹여버립니다. 하지만 이 극단적 이기주의와 집착의 결말은 결국 비참한 공멸입니다. 숙주인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순간, 자신을 끝없이 확장하려던 암세포 역시 그 자리에서 함께 파멸하기 때문입니다.
이 흥미롭고도 엄중한 생물학적 현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거대한 영적 경고를 던집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살려고만 하지, 죽어서 다시 살아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이기에, 육체적 종말이 임박한 이들은 깊은 공포에 휩싸이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요한복음 12장 24절을 통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위대한 역설 (Paradox)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찬란한 부활을 전제로 한 거룩한 통과 의례였듯, 진짜 생명은 죽음을 통과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 법칙은 인생의 끝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현장 속에서 날마다 나를 죽이는 ‘작은 죽음’을 연습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관념을 끝까지 관철하려 몸부림치며 주변을 황폐하게 만드는 내 안의 영적 암세포를 자각 (Awareness) 하고 걷어내야 합니다. 명예와 권력, 물질에 집착하며 세상의 에너지를 나에게로만 끌어당기려던 이기심을 적절한 때에 과감히 비워내고 (Detachment), 떠나야 할 때에 미련 없이 떠나는 것 또한 죽음의 거룩한 한 부분입니다.
거센 바람과 갈등이 불어올 때 내 주장을 내려놓고, 낮아지고, 포기하며 겸손해지는 ‘자기 부인’의 훈련은 자아 (Ego)에게는 죽음 같은 고통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죽어 침묵할 때 거센 바람은 이내 스쳐 지나가고, 그 비워진 자리에는 창조주가 주시는 영원한 평강과 새로운 제2의 생명이 피어납니다. 날마다 일상에서 죽음을 연습하여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장 무섭고도 위대한 영적 승리자가 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눅 5:38), 과거의 익숙했던 집착과 관념들을 날마다 대지에 묻고 성령이 주시는 신선한 호흡으로 깨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참된 자유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죽을 때 기꺼이 죽는 자가 전체 안에서 영원히 산다는 이 우주의 섭리 앞에, 오늘 아침 다시 한 번 겸손히 내 안의 밀알을 땅에 심어봅니다. 죽을 때 죽을 죽을 줄 아는 자가 가진 멋진 자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전하는 복
오늘도 우리는 아침 눈을 뜨며 우리는 숨을 들이마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앞마당의 풍경이나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은 선명하지만, 그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공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비어 있거나 없는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속에는 약 78%의 질소와 21%의 산소가 정교한 비율로 존재하며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원소들의 균형이 단 1%라도 어긋났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평온한 아침의 호흡은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공기는 텅 빈 허공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내는 거대한 ‘생명의 바다’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힘을 발견하고 활용한 순간마다 인류는 거대한 도약을 이뤄냈습니다. 20세기 초, 화학자 프리츠 하버 (Fritz Haber)는 공기 중에 흔하게 존재하지만 누구도 붙잡지 못했던 질소를 포착해 냈습니다. 공기 속 질소를 고정해 인공비료를 만들어낸 이 혁명은, 인류를 오랜 기아의 공포로부터 구출하고 수십억 명을 먹여 살리는 ‘빵과 떡의 기적’을 낳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 한 조각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본질을 만졌을 때, 인류의 가장 거대한 생존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내면세계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움직이고 지탱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머리 위 공중에는 수많은 전파의 연결 회로가 촘촘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전파 덕분에 우리는 멀리 있는 이들과 스마트폰으로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마음과 정보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살아갑니다.
기술적인 전파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진짜 가치 있게 만드는 사랑, 신뢰, 평안 역시 눈으로 그 형체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실재함을 압니다. 특히 믿음의 삶 안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숨결 (Ruach)을 느낍니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공기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을 호흡하게 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버팀목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8)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삶을 진정으로 풍요롭게 하고, 우리 존재를 유지해 주는 가장 본질적이고 소중한 것들은 대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산소가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러합니다.
오늘 하루, 당연하게 여겼던 숨 한 모금을 깊이 들이쉬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가만히 마음을 모아봅니다. 내 곁을 채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에게 깊은 고마움과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꽉 찬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은혜의 질소 비료를 나누는 삶
창밖의 나무와 풀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어찌하여 비가 오면 그저 맹물만 먹는 것 같은데도 저토록 무성하게 자라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비밀은 공기 중에 있었습니다. 대기의 78%를 차지하는 질소는 식물에게 가장 필요한 비료의 원천입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릴 때, 이 공기 중의 질소는 빗물에 녹아들어 식물의 뿌리로 스며듭니다. 비는 단순한 물이 아니라, 하늘이 보내준 영양분이었던 것입니다.
이 발견은 저에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 눈에는 그저 평범한 빗물처럼 보이는 은혜들이, 사실은 우리 영혼을 자라게 하는 ‘영적인 질소 비료’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삶의 대기 속에 그분의 은혜를 충만히 채워두시고, 고난의 비가 내릴 때마다 그것을 우리 삶의 깊숙한 곳으로 흘려보내 성장을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이처럼 정교하고도 신비롭습니다. 식물은 대기로부터 받은 영양분을 혼자 간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부지런히 흡수해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다시 다른 생명들의 양식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이 말하는 ‘생명의 순환’이자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나눔의 질서입니다. 우리 인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은 존재라면, 그 은혜를 나만을 위한 저수지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받은 축복이 내 삶이라는 나무를 거쳐 타인과 자연을 살리는 열매로 맺힐 때, 비로소 우리 삶은 온전한 하나님의 정원이 됩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제 것을 움켜쥐느라 고통받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31-32)
하나님은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풀을 입히시듯,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그분의 세심한 돌봄 아래 두셨습니다. 그러니 내일의 부족함을 염려하며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담대히 나누고, 그 나눔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이 자라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창조주의 섭리를 온전히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 박사님의 삶에도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혜가 가득하여, 그 사랑이 주변 사람들에게 풍성한 열매로 흘러가기를 소망합니다.
모두 모두 행복한 주일하루 되세요.

김병근 목사
시드니성시화운동 직전대표회장, 엠마오상담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