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택 목사의 신학논단 : 천로역정강해 (제11강의)

천로역정에 나타난 순례자의 교회와 신학적 성찰
1. 어거스틴의 방주 교회론과 『천로역정』에서 보여주는 돌보고 다시 파송하는 교회
초기 교회와 중세 교회는 종종 교회를 노아의 방주에 비유하였다. 특히 Augustine of Hippo는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이해하였다. 방주 밖에 있으면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듯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를 구원의 필수적 통로로 강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어거스틴의 대표작 The City of God에서 그는 노아의 방주를 단순한 구약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심판 가운데 보존되는 상징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The City of God 15권 26장에서 어거스틴은 방주를 “하나님의 도성” 또는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예표로 설명한다 (Augustine, 2003, XV.26, pp. 646–650). 이 관점에서 방주는 홍수 가운데 생명이 보존되는 장소이며, 교회는 세상의 멸망과 혼돈 가운데 구원의 백성이 보호받는 공동체로 이해된다.
물론 어거스틴에게 교회는 단순한 제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세상의 혼란 속에서 구원의 질서를 보존하는 장소로 보았다. 따라서 방주로서의 교회는 보호, 보존, 구원의 안전성을 강조한다. 이 교회론의 강점은 교회의 필요성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분명히 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관점은 교회를 지나치게 “구원의 장소” 또는 “안전한 내부 공간”으로 이해하게 만들 위험도 있다.
이와 비교할 때,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타난 교회 이미지는 조금 다르다. 『천로역정』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대표적 장면은 House Beautiful (아름다운집)이다. 기독도는 이 집에 도착하여 환대를 받고, 자신의 순례 여정을 점검받으며,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고, 앞으로의 영적 전쟁을 위해 무장을 받는다 (Bunyan, 2003, pp. 43–53). 그러나 중요한 점은 기독도가 House Beautiful에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죄의 짐은 이미 십자가 앞에서 벗겨졌다.
『천로역정』에서 교회는 구원의 권력을 독점하는 제도적 기관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순례자가 쉬고, 배우고, 분별하며, 다시 길 위로 파송되는 공동체로 나타난다. House Beautiful은 바로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기독도는 그곳에서 환대와 쉼과 가르침을 받지만, 그의 등에 있던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곳은 House Beautiful이 아니라 십자가 앞이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존 번연에게 구원의 근거는 교회의 제도적 권한이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러한 이해는 John Bunyan의 역사적 상황과 깊이 연결된다. 번연은 영국 국교회의 예배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비국교도 설교자로서, 국가의 허가 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기독교 선교 단체 “Desiring God”이 2014년에 무료 PDF로 출판하여 보급한 John Bunyan의 『The Pilgrim’s Progress』 의 역사적 배경에서 당시 17세기 영국에서 종교적 관용이 확립되지 않았다.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었던 집단은 국가가 승인한 영국 국교회뿐였다. 이런 배경에서 존 번연은 설교가 허가되지 않았다. 청교도들에게는 교회가 페지되였고 예배가 허가되지 않았다. 존번연은 12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Desiring God 2014, 5–6, 17-18 ). 이러한 고난의 배경 속에서 『천로역정』의 십자가는 특정 제도 교회가 독점하는 은혜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는 구원의 자리로 이해된다.
실제로 기독도의 순례는 교회 제도의 명령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장망성에서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의 필요를 깨닫는다. 원문에서 기독도는 “손에 책을 들고” 있었고, 그 책을 읽으면서 “울고 떨며,” 마침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외친다 (Desiring God, Bunyan 2014, 50). 이어 그는 들판에서 다시 책을 읽으며 깊은 괴로움 가운데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Desiring God 2014, 51). 이것은 기독도의 순례가 외적 제도의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어난 양심과 구원의 갈망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후 기독도는 해석자의 집을 지나 “구원”이라 불리는 담 사이의 길을 따라 올라간다. 그리고 언덕 위 십자가 앞에 이르렀을 때, 그의 등에 있던 짐이 어깨에서 풀려 떨어지고 아래에 있는 무덤 입구로 굴러 들어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Desiring God 2014, 88). 그때 기독도는 기쁨으로 “그가 자신의 고난으로 내게 안식을 주셨고, 그의 죽음으로 내게 생명을 주셨다”고 고백한 (Desiring God 2014, 88) 이 장면은 구원의 근거가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러므로 『천로역정』에서 교회의 권위는 십자가를 소유하거나 독점하는 데 있지 않다. 교회의 참된 권위는 십자가의 은혜를 증언하고, 그 은혜로 자유를 얻은 순례자를 환대하며, 말씀 안에서 그를 형성하고, 다시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데 있다. 감옥이든, 피난처이든, 억압의 현장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은 구원의 자리가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번연의 『천로역정』은 교회의 역할을 겸손하게 재해석하게 한다. 교회는 구원을 독점하는 기관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난 순례자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며 그들은 성령안에서 서로 돌보고 세우며 다시 길 위로 보내는 공동체이다. 『천로역정』은 교회의 사명을 여러 측면에서 성찰하게 하는 고전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개인의 구원 여정을 그린 이야기가 아니라, 순례자의 여정을 통해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17세기 영국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 미국으로 향해 떠나는 청교도들에게 교회는 단순한 예배의 장소가 아니었다. 교회는 낯선 땅으로 떠나온 순례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서로를 돌보며,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도록 격려하는 영적 가족이었다. 또한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개척하도록 파송하는 공동체이기도 하였다.
『천로역정』의 교회관은 오늘날 박해와 억압 아래 있는 교회들의 현실과도 공명한다. 공산권이나 중동의 이슬람권 사회에서 신앙을 지키는 공동체들은 화려한 건물이나 제도적 힘에 의존하기 어렵다. 그들은 말씀을 붙들고,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서로를 돌보며,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계속 걷는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박해 아래 있던 초대교회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초대교회 역시 사회적 권력이나 제도적 안정 위에 서 있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서든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떡을 떼며, 서로의 필요를 돌보고,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공동체였다.
따라서『천로역정』은 교회를 약화시키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참된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설 때만 참된 교회이다. 존 번연이 영국 국교회가 청교도들의 해산과 박해 하에 있을 때 자연스러히 구원의 본질이 특정 교단의 독점물이 아니라, 십자가에 있다고 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교회는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순례자들을 환대하고, 가르치고, 격려하며, 다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로 파송하는 곳이라는 존 번연의 교회신학은 설득력을 가진다.
2. House Beautiful (아름다운집))과 파송의 공동체에 대한 신학적 성찰
『천로역정』에서 교회는 순례자를 붙잡아 두는 장소가 아니었다. 기독도는 그곳에서 쉼을 얻고, 말씀을 배우고, 자신의 신앙 여정을 점검받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후 다시 길을 떠났다. 따라서 House Beautiful은 “정착의 공동체”라기보다 동시에 파송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성도를 자신 안에 머물게 하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순례자로 세상 속에 다시 보내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해석은 스코트랜드교회 주교였으며 선교신학자되시는 레슬리 뉴비긴 (Lesslie Newbigin 1909 – 1998)의 선교적 교회론과 깊이 연결된다. 뉴비긴은 교회를 복음을 소유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복음을 해석하게 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그는 회중을 “복음의 해석학”으로 보았는데, 이는 세상이 교회의 삶을 통해 복음이 무엇인지를 읽는다는 뜻이다 (Newbigin, 1989, pp. 227–233). 뉴비긴의 “복음의 해석학” 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용서하고, 섬기고, 환대하고, 고난 중에도 소망을 붙들고, 세상 속에서 진리를 증언하는지를 통해 해석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을 설명하는 기관일 뿐 아니라, 복음을 살아 보여 주는 해석 공동체가 된다.
House Beautiful이 보여주듯이 기독도의 짐이 십자가에서 벗겨진 이래 “아름다운집”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기독도를 맞이하고, 쉬게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신앙을 점검하며, 다시 길 위로 보낸다. 바로 이 점에서 아름다운 집은 “복음의 해석학”으로서의 교회이다. 교회는 구원을 독점하는 기관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순례자의 삶 속에서 해석하고 보여 주는 공동체이다.
프린스톤 대학의 선교신학자 달레 가더 (Darrell Guder) 역시 교회의 본질을 “보냄 받은 공동체”로 설명하였다. 그는 Missional Church에서 교회가 선교 프로그램을 가진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에 참여하도록 세상으로 보냄 받은 백성이라고 주장하였다 (Guder, 1998, pp. 4–8). 이 관점에서 예배, 교육, 공동체 훈련은 교회 내부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 증언을 위한 준비이다. House Beautiful에서 기독도가 전신갑주를 입고 다시 길을 떠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선교적 교회론의 상징적 표현이다.
또한 잘 알려진 독일 신학자 본 헤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교회를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그는 교회가 자기 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필요 속으로 들어가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Bonhoeffer, 1971, pp. 382–383). 이 점에서 House Beautiful은 교회가 순례자를 보호하지만 고립시키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공간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성도를 준비시키는 공간이다.
예일대학의 교회신학자였든 볼프 (Miroslav Volf )도 기독교 신앙이 사적 위로나 개인적 성공의 도구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는 공적 신앙은 세상을 지배하려는 힘이 아니라 공동선을 섬기는 증언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Volf, 2011, pp. 1–7, 89–91). 이 관점에서 교회는 성도들을 가정, 직장, 사회, 그리고 세계 속으로 보내어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게 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House Beautiful은 구원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순례자를 형성하고 파송하는 교회의 상징이다. 교회는 쉼과 가르침과 무장을 제공하지만, 그 목적은 머무름이 아니라 다시 길을 걷게 하는 데 있다. 존 번연은 영국 국교회의 박해로 해산되고 흩어진 성도들이 다시 찾아와 신앙을 회복하고 용기를 얻는 교회를 상상했을 수 있다. 이것이 『천로역정』이 현대 교회론에 주는 중요한 통찰이다.
3. 하늘 식민지 공동체 : 환대와 쉼과 파송의 교회
『천로역정』에서 교회는 단순히 교리나 제도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지친 순례자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쉼과 가르침과 용기를 제공하며, 다시 길 위로 파송하는 하늘의 공동체로 나타난다. 기독도가 만나는 여러 공동체적 장면들은 마지막 천성에서 완성될 하늘 공동체의 그림자와 같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House Beautiful (아름다운집)은 순례자를 환대하는 공동체이다. 기독도는그 집에는 네 여인이 Discretion (분별), Piety (경건), Prudence (지혜), Charity (사랑)을 만난다. 이 이름들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순례자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배워야 할 신앙의 덕목을 상징한다. 순례자는 혼자 길을 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분별, 경건, 지혜,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다시 형성된 믿음을 가지고 순례의 길을 계속한다. 그곳에서 Discretion, Piety, Prudence, Charity를 만나 자신의 순례 여정을 점검받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으며, 영적 전쟁을 위한 전신갑주를 입는다. 그러나 이 집은 그를 붙잡아 두지 않는다. 쉼을 준 후 다시 순례의 길로 보낸다. 이것은 교회가 안식처이면서 동시에 파송의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둘째, Interpreter’s House (해석의집)는 하늘 공동체의 한 모습이다. 그곳은 순례자가 신앙의 의미를 배우고 삶을 해석하는 장소이다. 교회는 단순히 감정적 위로만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방향을 분별하게 하는 해석의 공동체이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해석이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빛 안에서 인간의 경험, 상처, 실패, 선택, 관계, 사회적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과정이다. 교회는 신학을 성찰하고 해석하여 현재의 삶 속에 적용하도록 돕는 공동체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현실이 만나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지금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별하게 하는 영적 해석의 집이다. 그러므로 Interpreter’s House로서의 교회는 삶의 혼란을 신앙의 언어로 해석하고, 순례자가 다음 걸음을 분별하도록 돕는 하늘 공동체의 한 모습이다.

셋째, Delectable Mountains (기쁨의산)의 목자들은 순례자들에게 길을 보여주고 위험을 경고한다. 이들은 목회적 돌봄과 영적 안내의 상징이다. 교회는 순례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함께 바라보고, 경고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이다. 목자의 역할은 단순히 앞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순례자가 어디에 서 있는지 살피고, 앞으로 가야 할 길과 피해야 할 위험을 분별하도록 돕는 것이다. Delectable Mountains에서 목자들은 순례자들에게 멀리 있는 천성을 바라보게 하며, 동시에 잘못된 길과 유혹의 위험을 알려준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명이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희망의 전망을 보여 주어야 하며, 동시에 세상의 유혹과 신앙의 혼란 앞에서 지혜로운 경고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순례자를 통제하는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함께 길을 찾고 세상과 바른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능력을 길러주며 안내하는 목회적 역활을 안내하는 공동체이다.
마지막으로 천성에 도착한 기독도와 소망이 (Hopeful)은 완성된 하늘 공동체의 환영을 받는다. 죽음의 강을 필사적으로 건넌 두 순례자는 문 앞에서 영접받고, 찬양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잔치로 들어간다. 순례의 길에서 만난 여러 교회의 모습들은 이 완전한 하늘 공동체의 미리보기였다.
이 점은 역사와 영성신학자이며 스코트랜드 University of St Andrews의 명예교수인 불레드리 (Ian Bradley)의 켈틱 교회 이해와도 연결된다. Bradley는 그의 책 Colonies of Heaven: Celtic Models for Today’s Church에서 초기 켈틱 교회의 공동체적 특징을 현대 교회가 다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모델로 제시한다. 그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성장한 초기 켈틱 수도원 공동체를 단순히 은둔적 수도원의 형태로만 보지 않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미리 보여 주는 “하늘의 식민지,” 곧 colonies of heaven으로 이해한다 (Bradley 2000, xi, 6).
Bradley에 따르면 초기 교회사에서 (4-6세기) 켈틱 교회 공동체는 기도와 예배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순례자와 낯선 이를 환대하고, 선교사들을 파송하며, 그들이 돌아올 때 다시 맞이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에게 돌봄, 배움, 치유, 식탁, 쉼, 기도의 공간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켈틱 수도원 공동체는 병원, 학교, 식탁 공동체, 쉼터, 기도의 집과 같은 역할을 함께 감당하였다 (Bradley 2000, 44–45, 54).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일상생활 속에서 연습되고 경험되는 관계적 공동체였다. 교회가 상담, 임상목회 돌봄, 약자의 보살핌, 사회로부터의 소외그룹에 대한 목회적 돌봄의 적극적 돌봄에서의 성찰과 행위가 필요하다. 더 많은 전문적 교회의 역활을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Bradley의 통찰은 이민자 순례 신학에도 중요한 의미를 준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완성 자체는 아니지만, 그 완성을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자 공동체이다. 따라서 참된 교회는 지친 순례자를 맞이하고, 먹이고, 가르치고, 회복시키며, 다시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하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늘공동체는 하늘의 모습,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하늘나라의 회복은 거대한 우주적 치료의 회복이 이루워진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게 하신다. 이 말씀은 하늘나라의 회복이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상처, 죽음, 고통, 슬픔의 치유임을 보여줍니다.
4. 순례자의 교회 : 이민자 교회의 순례적 모델
이민자 순례 신학에서 보면, 『천로역정』에서 보여주는 교회의 역활은 이민자 교회의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이민자 교회는 낯선 땅에서 지친 이민자를 환대하는 집이어야 한다. 이민자는 새 문화권에 들어오면서 언어의 어려움, 직업의 변화, 사회적 지위의 상실, 가족의 부담, 자녀 세대와의 거리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경험한다. 교회는 이러한 이민자의 이야기를 단순히 문제로 보지 않고, 순례자의 이야기로 들어야 한다. House Beautiful에서 기독도가 자신의 여정을 말하고 경험했던 것을 함께 나누며 돌봄을 받았듯이 이민자도 교회 안에서 자신의 떠남, 상실, 두려움, 은혜의 경험을 다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민자 교회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장소이다. 이민자는 단순히 “고향을 떠난 사람”이나 “새 땅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떠남과 정착의 관계속에 있는 순례자이다. 과거의 정체감과 새땅에서 형성될 정체감을 동시에 가진다. 문화배경, 인종, 전통의 정체감이 있다. 그러나 새땅에서의 주체적인 자아형성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민자가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움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부모 세대의 기억과 다음 세대의 질문이 복음 안에서 만나도록 해야 한다.
불레드리 교수가 성찰했든 초기 켈틱 교회 공동체는 이민자 교회도 받아드려야 할 교회전통이다. 이민자 교회는 단순히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삶을 미리 보여 주는 “하늘의 식민지”이며, 지친 이민자 순례자를 환대하고 형성하며 파송하는 순례의 집이다. 이민자 교회도 성도들을 가정, 직장, 학교, 지역사회, 다문화 사회, 그리고 창조 세계 속으로 다시 파송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민자 교회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순례자를 환대하고 형성하며 세상 속으로 보내는 순례의 집이다 (다음호에 계속).
References
Augustine. (2003). The City of God (H. Bettenson, Trans.). Penguin Classics.
Bonhoeffer, D. (1971).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E. Bethge, Ed.). Macmillan.
Bradley, I. C. (2000a). Celtic Christian Communities: Live the Tradition. Northstone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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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nyan, J. (2003). The Pilgrim’s Progress (R. Sharrock, Ed.). Oxford University Press.
Desiring God. PDF edition. (2014). Bunyan, John. The Pilgrim’s Progress. Minneapolis: pagination. pp. 17–18 , 50–51,88.
Guder, D. L. (Ed.). (1998). Missional Church: A Vision for the Sending of the Church in North America. Eerdmans.
Newbigin, L. (1989).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Eerdmans.
Volf, M. (2011). A Public Faith: How Followers of Christ Should Serve the Common Good. Brazos.

이상택 목사
(아이오나 콜럼바 대학 학장, 신학과 실천신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