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6월 28일, 제2차 세계 대전: 청색 작전 (Fall Blau, 1942년 6월 28일) 시작
독일 남방 집단군은 코카서스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 남부의 스텝 지대를 꿰뚫는 공세를 시작하였다. 히틀러에게 유전 지대의 점령은 다른 장군들이 권고하는 모스크바 점령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 전선에 더 많은 병력과 지원을 했다. 여름 공세의 암호명은 “청색 작전” (독: Fall Blau)이었다. 여기에는 독일 6군, 17군, 4기갑군, 1기갑군이 참가했다. 1941년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각 지점에서 공세를 개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작전에 참견해서 집단군을 두 개로 나누었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남부 A집단군은 제17군과 제1기갑군과 함께 코카서스로 진격을 계속하도록 했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제6군과 호트의 4기갑군을 포함하는 남부 B집단군은 동진하여 볼가 강 연안의 스탈린그라드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B집단군은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가 지휘했다.
청색 상황의 원래 이름은 지크프리트 작전 (독: Unternehmen Siegfried)이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5일, 히틀러는 이 작전명을 청색 작전으로 바꾸고, 각 부대에 명령서를 하달했다. 작전은 4단계로 나뉘었다.

보로네시를 점령하여 측면에서의 소련군의 위험을 제거한다.
돈강을 도하하여 돈 강 너머의 소련군을 격파한다.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여 철로를 점거한다.
소련 남부 코카서스 유전 지대를 장악하고, 이란 국경까지 진격한다.
청색 상황의 개시일은 원래 1942년 5월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포위에 참가 중이었기 때문에 6월에 세바스토폴이 함락될 때까지 몇 차례 연기되었다. 이 동안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으나, 독일군은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이미 배치되어 있던 병력으로도 소련군 공세를 막아냈다. 그래서 제2차 하리코프 전투에서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 버리는 전투가 행해져 5월 22일에는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이 포위되었다.
청색 상황은 최종적으로 6월 28일에 개시되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넓은 스텝 초원에서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무질서한 패주를 시작했다. 저항선을 구축하려는 여러 시도가 다른 독일군 부대의 측면 포위로 좌절되었다. 소련군은 7월 2일 하르코프 북방의 포위망과 일주일 후 밀레노보와 로스토프 근방의 포위망에 갇혀 각각 섬멸되었다.
그동안 헝가리 제2군과 독일 제4기갑군은 보로네시 공세를 개시하여 7월 5일 함락시켰다.

스탈린그라드를 향하는 B집단군의 초기 진격은 매우 순조로워 히틀러는 이에 소속된 제4기갑군이 코카서스로 동진하는 A 집단군에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6군과 4기갑군이 같은 도로를 사용하게 되어 지역의 부족한 도로 사정과 맞물려 대규모의 교통 정체를 야기했다. 이 지연은 매우 길어서 적어도 1주간의 진격이 지체되었다. 이렇게 되자 히틀러는 다시 마음을 바꿔 다시 4기갑군에게 스탈린그라드 공략에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7월의 하순까지 독일군은 소련군을 돈강까지 밀어붙였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동맹국인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을 이용하여 방위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수십 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그들의 남방에 있던 4기갑군은 시의 공략을 위해 북방으로 진격로를 돌렸다. 남방에서는 A집단군이 코카서스를 향해 돌진 중이었으나 진격속도는 둔화되었다. A집단군은 B집단군을 지원할 수 없는 먼 남쪽까지 진출하였다.
이제 독일군의 의도는 소련군 지휘관들에게 분명해졌다. 소련군의 7월 작전 계획은 스탈린그라드를 방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독일군의 공세 앞에 동쪽으로 후퇴하던 소련군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스탈린그라드의 동쪽은 폭이 넓은 볼가 강이었고, 강을 넘어 다른 소련군 부대들이 배치되었다. 이런 부대들이 새로 62군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인근의 64군(슈밀로프 중장 지휘)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이루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안드레이 예료멘코 대장이 지휘했고, 시내에 포진한 62군은 처음에 로파틴 중장이 사령관이었으나 그가 수비에 비관적이었고 병력을 볼가 강 너머로 후퇴시켰기 때문에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으로 교체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성공적인 것이었다). 소련군의 목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스탈린그라드 시를 사수하는 것이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