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출신의 그리스도교 신학자, 성서 주석가, 주교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Theodore of Mopsuestia, 350년경 ~ 428)
시리아 출신의 그리스도교 신학자, 성서 주석가, 주교. ‘해석자’ The Interpreter라는 칭호로 불린다. 350년경 안티오키아에서 관직을 지낸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법조인을 꿈꾸며 저명한 소피스트 수사학자 리바니오스에게 철학과 수사학을 배웠으며, 이때 함께 수학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가 369년 그를 수도 생활로 이끌었다.

안티오키아의 성서 주석자이자 금욕주의자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 아래서 공부했다. 383년경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스승 디오도루스를 능가하는 성서 주석가로 명성을 떨쳤다. 392년 킬리키아 지방 몹수에스티아 (현재 튀르키예 야카피나르) 주교로 선출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36년간 재직했다.
생전에 동방 교회 전체에서 높은 권위를 누렸으며 428년 몹수에스티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에페소스 공의회 (431)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받은 후 그의 견해와의 연관성이 문제시되었으며, 6세기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압력 아래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553)의 ‘세 장 논쟁’에서 그의 저술들이 사후 정죄받았다. 이 결정은 서방 유력 신학자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반면 페르시아 회의 (484)는 그를 올바른 신앙의 수호자로 공인했으며 동방 교회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그를 교의와 해석의 최고 권위자로 받아들였다.
성서 주석과 관련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의 해석에 정면으로 맞서 성서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우선시하는 안티오키아 해석학을 대표하는 이로 평가받는다. 그의 소예언서 주해는 이전 주석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약 속 예언을 그리스도론과 연결해 해석하는 방식을 신중하게 제한해 수백 년 후 근대 역사비평 성서 해석의 선구로 평가받기도 한다.
주요 저술로 (현재는 대부분 단편으로만 있는) 「열두 소예언서 주해」, 「시편 해설」, 「성육신에 관하여」, 「사제직」, 「완전한 지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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