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은퇴하지 못한 것은 직분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머리는 희어지고 걸음은 느려진다.
그러나 세월이 모든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해마다 나이테를 늘리지만,
어떤 나무는 속이 비어 간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세월은 시간을 더할 뿐,
반드시 지혜를 더하지는 않는다.
특히 목회자의
삶을 바라볼 때 더욱 그렇다.
평생 강단에서 사랑을 설교하고,
화해를 외치며, 십자가를 전했던 사람들이
은퇴 이후에도 학연과 지연, 혈연
교단과 계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비난하고 조롱하며
분열하는 모습을 볼 때면,
슬픔은 비판보다 먼저 찾아온다.
정치인조차 때로는 국가라는
더 큰 이름 앞에서 손을 맞잡는데,
하나님 나라를 말하던 사람들이
끝내 자기 편과
남의 편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묻게 된다.
과연 그들이 평생 섬긴 것은
하나님이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신의 세계였는가?.
성서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바벨탑(창세기 11장)은
벽돌을 쌓은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이름을 높이려 했던
인간 욕망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하늘에 닿으려 했지만
결국 서로의 말을 잃었다.
언어를 잃기 전에
이미 관계를 잃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가장 자주 책망하신 대상도
세리가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못했다.
성전을 사랑했지만 사람을 잃었고,
진리를 외쳤지만 자비를 잃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마 23장)이라 부르셨다.
무덤은 겉은 희지만
안에는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 역시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향해 탄식한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속하였다.”(고전1:12)
복음은 하나였지만 사람들은
복음을 자신들의 깃발로 만들었다.
그 순간 그리스도는 중심에서 밀려나고,
이름이 우상이 되었다.
오늘의 교회도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출신학교를 따르는 공동체가 되고,
복음을 전하는 모임이 아니라
계보를 보존하는 조직이 되며,
성령의 교제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연합이 되어 버릴 때,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표지가 아니라
인간 권력의 축소판이 된다.
철학은
이러한 현상을 오래전부터 통찰해 왔다.
플라톤은
정의로운 공동체보다
욕망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먼저 무너진다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선을 잃은 정치는 필연적으로
사익의 정치로 전락한다고 말했다.
헤겔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 역사를 움직인다고 하였고,
니체는
권력의지가 도덕의 언어를 빌려
자신을 숨긴다고 말했다.
미셸 푸코는
권력은 폭력이 아니라 담론 속에서
자신을 재생산한다고 분석하였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권력은 반드시 직함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은퇴한 뒤에도 사람은 명예를 붙들고,
영향력을 놓지 못하며,
자신이 속했던 세계를 계속 지배하려 한다.
직분은 내려놓았지만 권위는 내려놓지 못한다.
심리학은
이것을 더 조용한 언어로 설명한다.
에릭 에릭슨은 노년의 과제를
자아통합(Integrity)이라고 불렀다.
인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평화를 얻지만,
자신의 과거를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은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
칼 융은 노년을
“자기(Self)를 만나는
마지막 여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만나기보다
과거의 명함을 다시 꺼내 든다.
목회는 끝났지만
목회자라는 자아는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은퇴 이후에도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분열은 신념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잊힐 것이라는 두려움.
내 영향력이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내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두려움.
사회학은
또 다른 진실을 보여 준다.
막스 베버는 모든 카리스마는
시간이 지나면 제도로 굳어진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성령의 운동으로 시작한 공동체도
시간이 흐르면 조직이 되고,
조직은 규칙을 만들며, 규칙은 권력을 낳는다.
그리고 권력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적을 만든다.
계파는 신학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
교리는 나중에 따라온다.
그래서 같은 성경을 읽고도
서로를 정죄할 수 있고,
같은 성찬을 나누면서도
서로를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끝내 다른 길을 제시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것은 겸손의 상징만이 아니었다.
권력을 내려놓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세운
높은 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 곁으로
가장 낮게 내려오신 자리였다.
그렇기에 진정한 은퇴는
목회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직함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비우는 것이다.
계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떠나는 것이다.
노년은
영향력을 연장하는 시간이 아니라
지혜를 나누는 시간이어야 한다.
많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이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품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강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에 강이 되고,
바다는 모든 강을 품기에 바다가 된다.
노년 역시 낮아질 때 깊어진다.
교회가 세상보다 먼저 화해를 배우지 못한다면
세상은 교회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가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못한 것이 직분이 아니라 자아였다면,
은퇴하지 못한 것은
목회가 아니라 욕망이었다.
우리는 언젠가 강단을 떠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만 남기실 것이다.
“너는 얼마나 오래 설교했느냐?”가 아니라,
“너는 마지막에 누구를 사랑했느냐?”
그 질문 앞에서는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계파도, 직함도 아무 의미가 없다.
남는 것은 사랑뿐이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내어줄 뿐이다.
필자가 공부했던 신학교 교가 가사는
1,2절로 아주 짧게 두개만 강조한다.
그 이름은 예언자, 그 이름은 예언자
그 이름은 전도자, 그 이름은 전도자
감독회장, 감독, 감리사, 담임목사, 부목사
회장, 총장, 한국군목회 사무총장 이런 직분이 없다
그래서 은퇴 목사는 목사가 아니라
인생을 앞서 살아간 ㅇㅇㅇ선생(先生)이다.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배경음악/ Arvo Pärt:
Spiegel im Spiegel for Cello and Piano
202607020
교회 서재에서
匍越의 [告解]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