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잡기장

메멘토 모리
•코로나로 인하여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대면 모임을 계속 할 수 없었던 무렵이었다. 나는 2020년 4월 부터 <인문학교실 카톡방>을 통하여 어줍잖은 잡기장도 150여회나 써서 함께 나누어 왔지만 그 무렵 <라틴어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라틴어 공부도 했었다. 물론 제한된 카톡방에서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라틴어 알파벳 부터 시작하여 발음기호, 모음과 자음을 공부하고 약 60여개의 라틴어 단문들을 함께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누었던 라틴어 명문들 중에는 지금도 생각나는 것들이 많이 있다. Carpe diem (오늘을 붙잡으라 / 오늘에 충실하라), Memento Mori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Salve (안녕하세요?), Vale (안녕히 가세요), Excusa (죄송합니다), Gratias (감사합니다), Amore mio (나의 사랑하는 이여!), Amor fati (주어진 인생을 사랑하라), Amor est vitae essentia (사랑이 인생의 본질입니다), Hoc quoque transibit (이 또한 지나 가리라), 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Quid est veritas (진리가 무엇이냐?),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을 포함하여 수십 개의 길고 짧은 문장들을 거쳐 마지막엔 Ego sum via veritas et vita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와 Dona nobis pacem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으로 끝을 맺었었다.
•그때 나눈 라틴어 중 하나인 <Memento Mori>에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유명한 경구에는 다음과 같은 두개의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로마 공화정 시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 장군의 환영식에선 항상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전차에 비천한 노예 한명이 개선 장군의 곁에 앉아서 계속해서 “memento Mori”라고 말해 주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승리의 기쁨과 화려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Remember you must die! 당신도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는 예전 로마의 황제에게는 매우 특별한 직책을 지닌 신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침 마다 황제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황제의 침실로 들어가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Memento Mori!” –Remember you must die!> 천하의 황제라도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지요. “Memento Mori !” 정말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될수도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추천도서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손호현 지음, 동연, 2015. 이 책은 해석학과 성서신학, 역사학과 철학, 과학과 예술, 경제학과 평화 등 14 가지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들을 가지고 기독교와 소통하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시도한 책이다. <시드니 목회자 인문학교실>에서는 이 책을 주교재로 하여 한달에 한번씩 3년째 공부하며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의 잡기장은 주로 이 책 중 <제 10장 메멘토 모리>에서 옮겨온 글이다 (이 책 제 10장 “메멘토 모리” 파트의 발제자 장대호 목사의 Presentation paper는 아주 잘 준비된 학습자료이다). 저자 손호현 교수는 여러가지 다양한 견해와 토론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에다 나의 생각을 약간 덧붙여 잡문을 만들어 보았다.
1)불설비유경 (佛說比喩經)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여행자가 길을 가다가 사나운 맹수의 쫓김을 받게 되었다. 그는 주변에서 물없는 한 우물을 발견하곤 그 우물속으로 들어가 넝굴가지 하나를 붙잡고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아래를 내려다 보니 거기엔 커다란 용 한마리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잡고 있는 넝굴을 놓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밖으로 나갈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속에서 위를 올려다 보니, 흰 쥐 한마리와 검은 쥐 한마리가 번갈아 가며 그가 웅켜쥐고 있는 넝쿨가지를 갉아먹고 있었다. 넝굴가지가 끊어지는 순간 아래로 떨어져 그만 용에게 물려 죽을 수 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런데 그 여행자가 잡고 있던 넝굴가지에 붙어있던 벌집에서는 꿀방울이 그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여행자는 이렇듯 죽음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오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등으로 흘러내리는 꿀을 핥아 먹으며 “아 달구나!” 미소 짖고 있었다. 쫓기는 인생, 넝굴을 부여잡고, 밝은 낮과 검은 밤을 지내면서도, 하루하루 흘러내리는 꿀을 핥아먹는 인생!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2)인간의 죽음은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생물학적 죽음이다. 막스 셀러 (Max Scheler)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음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간접적 경험이나 교육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생물학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주장이다. 둘째는 사회문화적 죽음이다. 푹스 (W. Fuchs)나 하안 (A. Hahn)은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사회적 경험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죽음을 학습하게 된다>고 말한다. 셋째는 종교적 죽음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이란 유한성을 지닌 존재라고 말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너는 유한한 존재이며 언젠가는 반듯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라>는 뜻이다. 인간을 가르키는 라틴어 “Homo”는 “땅”이란 뜻을 지닌 “Humus”에서 나왔고 히브리어 “Adam”도 흙을 가르키는 “Adamah”에서 나온 말이다. 종교는 <인간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임을 분명히 한다.
3)그럼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로 그 존재를 유지하는가? 여기에도 몇 가지 다른 설들이 있다. 첫째는 영혼 불멸설이다. 플라톤을 중심한 이 이론의 핵심은 인간이란 영과 육으로 된 존재라는 이원론을 기초로 한다. 인간의 몸은 죽어도 영혼은 결코 죽지 않고 이데아의 세계에서 영원히 산다고 믿는 것이다. 둘째는 윤회설이다. 인간은 죽은 후 그 영혼이 육에서 빠져 나와 다른 인간이나 동식물로 환생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힌두교의 카르마 (業karma) 이론에 기초한 주장이다. 불교에서도 이 윤회설을 지지한다. <이것이 여기 있음으로 저것이 있게 되고, 저것이 거기 있음으로 이것이 여기 있게 된다> <이것이 없어짐으로 저것도 없어지게 되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도 멸하게 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이 생명체이든 무생물이든 피차 돌고 돈다. 따라서 죽음이란 한 존재의 마지막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옮겨가는 관문이라는 것이 윤회설이다. 셋째는 부활설이다. 기독교 교인들 중에도 부활설과 이원론을 혼돈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사실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식의 이원론을 거부한다. 기독교에선 인간은 영과 육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본다. 인간은 통전적 존재이기에 영혼 없는 육체가 있을 수 없듯이 육체 없는 영혼도 불가능하다고 주장이다. 인간은 죽을 때 그 영과 육이 함께 죽고 최후의 심판날이 오면 그 죽었던 영과 육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설을 지지한다. 동시에 기독교에서는 최후의 날 인간의 몸과 혼이 다시 부활할 때 그 부활체는 이전에 지녔던 육체나 영혼과는 전혀 다른 <변화된 새로운 존재>라고 말한다. 부활설을 믿는 기독교에서는 부활 후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인간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서게 된다고 믿는다.
4)가톨릭에서는 연옥설 (purgatory)을 주장한다. 연옥설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로 부터 벗어난 영혼이 최후의 심판이 있기 까지 중간에 머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연옥이라는 이론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에서 강조했던 교리들에 근거하여 이 연옥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인간이 죽은 후 최후의 심판이 있을 때 까지의 중간기를 수면기간이라고 본다. 그들은 성서에서 죽은자들은 흔히 <잠자는 자>로 묘사되어 있으며 바울이 <예수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한 것을 그 근거로 하여 수면이론을 내세운다. 목회를 하는 동안 나는 하관식이나 화장예식을 포함한 장례식을 거행 하면서 주로 목회적 배려 (Pastoral consideration)에 따라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였지 이런 식의 교리에 근거한 사후 세계와 그 중간기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았다.
5)최후의 심판 후 기독교인들은 다 천국에 가고 비기독교인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는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믿는다.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가 말하는 <이중예정설>이다. 그러나 소수이기는 하지만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틸리히 (P. Tillich)는 <천국에 가서도 지옥에서 고통 당하는 이들을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런 문제들도 제기 될 수가 있다. 한번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은 그 전후의 삶과는 상관 없이 모두 다 천국으로 가고, 한번도 주님을 영접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다 지옥으로 가는가? 제 주변에는 지금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모두 다 구원을 얻게 되고 천국에 간다고 믿고 그렇게 말하는 목사들도 있다. 정말 그럴까? 영화 <밀양>은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히틀러는 독재자요, 살인마요, 기독교를 이용하여 나치즘을 만든 사람이었으나, 어렸을 때 그는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아세례를 받고 가톨릭학교에 다녔으며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 후 견진성사까지 받았던 성실한 교인이었다. 그는 천국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 스탈린 역시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자라나 깊은 신앙심을 지녔으며, 9살 때는 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교회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15살 때는 교회로 부터 장학금을 받아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었다. 그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해 드리고 장차 사제가 되기를 소원했던 신학도로 공부도 잘했고 신앙심도 좋았으나 그만 3학년 때는 금서로 지정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들을 읽다가 불량학생으로 낙인 찍혀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사제 후보생이었던 스탈린은 천국에 갔을까, 아님 지옥으로 떨어졌을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은 천국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 나의 할아버지는 일찌기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 어른들은 제각기 천당과 지옥으로 갈라져서 가 계실까? <메멘토 모리>를 읽고 토론을 계속하는 동안 우리는 이와 유사한 질문들과 많이 부딪치게 된다. (끝) *홍길복 (2026. 7. 20)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