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sing: 교육논단

김훈 목사의 특별기고 건강한 분노표현 아이가 똑똑하고 말도 잘 듣는 착한 아이다 보니 엄마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일을 시키다 보니 그 일이 당연한 듯 되어 힘들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금쪽 같은 내 아이” 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착하고 말 잘듣는 아이들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코너가 가끔 나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런 아이들은 억압된 분노가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필자의 집의 4째 아이가 그랬습니다. 늘 집 청소도 잘하고 엄마, 아빠의 부탁에 짜증을 내지 않고 잘 하는 아이가 괜찮은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속으로는 많이 억울해하며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표현을 하는 아이나 표현을 하지 않는 아이나 모두다 잘 살펴 주어야 함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를 겉으로 잘 드러내어서 ‘저 사람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야’ 라고 쉽게 알아차리는 데 화를 속으로 누르고 억압하는 사람은 속으로만 힘들어 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 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화를 내는 사람이든 화를 속으로 참는 사람이든 ‘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정신 건강에 아주 해롭습니다. 지속적으로 분노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심장 혈관계가 망가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각종 암과 감염등의 질환에 취약해질 뿐 아니라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잘못된 위안 수단인, 음주, 흡연, 과식 등의 습관을 가지게 되어서 더 건강이 나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분노가 일어나면 몸에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많이 나오고 지방이 많이 분비되고 그 지방이 콜레스테돌로 전환이 되고 혈소판을 더 응고시켜 심장 질환이 일어나게 하기도 합니다.분노를 억압하는 사람들은 예전에는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과격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시도들을 했지만 그렇게 과격하게 분노를 표현하고도 분노가 해소가 안되고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을 실험하면서 과하게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도움이 많이 되진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노를 느낀 상황에서 무조건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노를 잘 해석하고 그것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감정들은 감정이 하는 고유한 기능이 있고 그렇기에 그 기능을 잘 이해하고 기능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너무나 감정을 억압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한 번 즈음 충분히 섭섭한 마음을 강하게 라도 풀어내게 하는 것은 감정을 표현해 보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의미에서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가끔 밥주걱 같은 것을 가지고 푹신한 것을 때려보게 하는 일과 같은 것을 하게하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분노를 풀어내는 것은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일단, 분노가 느껴지면 어떤 행동을 취하라고 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어떤 행동을 취하라는 신호인지를 잘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어서 화가 난다면 그 때는 그 화를 내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차에 치이려고 하는 상황에서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습관적으로 과민하게 반응하며 화를 내는 것인 지 또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좌절로 인한 분노인지, 상실로 인한 분노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이라는 책에는 분노를 다루는 방법을 설명해 주는 데 화가 나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레드포드 윌리암스 교수는 분노를 다루는 법을 네 가지 측면을 생각하면서 설명하는 데 그것을 살펴봅시다. 먼저는 ‘중요성’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에 중요한 일인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선생님이 저에게 했던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아라 ‘ 라고 했던 말은 저에게 중요성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표현이었습니다. 일 주일이나 한달 후에 이 일을 생각했을 때 그렇게 화가 날 만한 일인 지를 생각해 보고 만약 그렇지 않은 사소한 문제라면 ‘이 일은 중요한 것 아니야 . 사소한 거야’ 라고 말하며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당성’의 문제입니다. 때로 우리는 화가 날 수 있는 데 다른 것에서 화가 난 것을 엉뚱한 곳에서 풀어낼 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 내 분노와 생각과 느낌이 이 상황에 적절한 것인가? 너무 과하게 반응하거나 너무 억압하는 것이 아닌 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일어난 상황을 만약 이성적이고 현명한 사람들이 비슷한 일을 경험한다면 나와 똑 같은 기분을 경험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분노에 대한 반응을 적절하게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변화’의 문제입니다. ‘ 지금 상황이 바꿀 수 있는 것인가? ‘ 또는 “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함으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지?’를 생각해 보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꿀 수 없다면 현재의 상황을 수용하도록 생각을 바꾸어서 감정을 편안하게 도와주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는 ‘가치’를 생각합니다. 여기의 가치는 나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할 때 내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만약 구체적 행동을 취할 만큼 가치가 없다면 화나는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분노의 정당성으로 인해 법적인 조치를 취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법적인 조치를 취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레드포드 윌리암스 교수는 이렇게 4가지를 질문했을 때 하나라도 ‘아니요’ 라는 답이 나오면 자신의 반응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화를 낼 만한 일이 아니고 중요한 일도 아니고 가치가 없는 일이기에 분노하는 것을 수정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입니다.…

서미진 박사의 특별기고 인간의 존엄성 늦게 교회에서 알게된 친구 집사님이 계신다. 아프신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는 집사님의 모습은 늘 귀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어머님이 거동이 불편해지시고 음식을 잘 들지 않으면서 살아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이 드시는 지 기도 제목을 부탁했다. 그 중에 하나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기도해달라고 하셨는데 집사님의 기도처럼 노모친이신 권사님은 곡기를 끊으시고 음료형태의 영양분을 조금씩만 드시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알아 보셨고 지난 주에 만난 나에게는 “ 예쁘다” 라고 까지 이야기 해주셨다. 육체가 쇠잔해지고 점점 얼굴의 표정은 없어지시지만 그래도 곱게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계시는 권사님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집사님의 기도 제목을 들으며 집사님이 말한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집사님이 이야기한 어머니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사람을 알아보며 치매환자처럼 비참한 모습이나 뇌사처럼 연명 치료만 하는 모습이 아니기를 바란 마음에서 온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죽기 전까지 자유와 선택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마도 어머니를 향한 존엄성에 대한 마음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보게 된다. UN에서 1948년 12월 10일에 말한 세계 인권 선언에서 존엄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자유와 권리는 지켜져야 한다고 온 세계가 함께 합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은 비교에서 온 것은 아니다. 이성이 더 발달되어 있거나 생각의 깊이가 깊어서 또는 더 탁월하기 때문에 또는 계층구조에서 더 놓은 곳에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 이유만으로 인간은 존엄성이 내제 되어 있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에 의의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의 세계적인 전쟁과 같은 아픔이 없도록 그 존엄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선포하며 법 앞에서 모두는 차별없이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전 세계가 같은 목소리로 인간의 존엄성은 이야기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현실 사회에서는 존엄성과 거리가 먼 경험들을 하면서 우리는 살아가게 된다. 겉으로 잘 포장된 선진화된 호주에 살면서 이민자로 산다는 것, 원주민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 등을 다룰 때 비차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차별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일들이 많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도 윗 상사에게 잘 보여서 아부를 잘 떨어야 승진을 할 수 있고 좋은 일을 시도하는 것에 있어서 조차도 정치적인 힘을 빌릴 때 훨씬 더 잘 된다는 것, 학교에서도 선생님의 사랑받는 학생이 될 때 훨씬 더 유리하다는 것, 병원에서 불의한 일을 당했어도 참아야 하는 것, 경험이 많고 많이 가진 사람에게 기회가 더 주어진다는 것 등은 어느 사회에 있던 지 간에 다 적용이 되어지는 힘의 권력이 가져오는 차별적 대우들의 모습이다. 이런 것들을 사회에서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차별이나 불의한 일에 무척이나 화를 내면서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고 인간이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실제 개인의 삶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나가는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나가지 못할 때가 참 많은 것을 볼 때 우리 인간들의 연약함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부패된 사회적 구조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하기 전에 개인의 작은 삶에서 우리는 가족이나 이웃의 한 사람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일부터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어떤 분이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을 세상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는데 만약 자신이 자신의 삶부터 바꾸려고 했다면 어쩌면 세상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일상에서 위기를 늘 경험하는 인간은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부분에서 연약한 것 같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인간의 존엄성을 놓아버리는 결정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원치 않았던 아이가 혼전 임신이 되었을 때 자신의 아이가 존엄성을 가진 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모르고, 쉽게 낙태를 하거나 길에 아이를 유기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최근 넷플릭스의 인기 있는 드라마 ‘마이 데몬’에서는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의 특성 중 하나인 ‘도덕성’을 물질적인 부요와 성공과 쉽게 바꾸는 일들을 저지른다. 바로 목숨과 성공을 바꾸어 버리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의 장기를 팔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한 마음의 동기를 이용해 동남아의 어린 소녀들을 돈을 받고 사창가에 팔아버리면서 중독자로 만들어 버리는 일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잃게 하는 대표적인 일들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삶의 죽음이 결정되어지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끝까지 그 존엄성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빅토르 플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의 경험을 들어보면 생존의 위기가 매일 같이 찾아오며 배고픔과 질병과 생존의 투쟁이 있는 그 곳에서도 아픈 사람을 돌보며 옆 사람에게 양보를 하고 힘든 일 중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며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나보다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숭고한 인간 존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인간의 참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질 수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치매나 기타 질병으로 인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지는 것 같이 여길질 수 있지만  필자는  치매나 심각한 질병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가족들이나 주위의 사람들의 행동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질병이나 아픔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이다.  그 반응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작은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주는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는 한 사람에 대한 배려와 돌봄이 인간답게 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지켜내는 것이며 세계 인권 선언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서미진…